creamkj

아인슈타인 사망하자…"왜 천재였지?" 동의 없이 뇌 조각내서 보관 본문

일상다반사

아인슈타인 사망하자…"왜 천재였지?" 동의 없이 뇌 조각내서 보관

creamkj 2024. 4. 18. 11:08
반응형

아인슈타인 사망하자"왜 천재였지?" 동의 없이 뇌 조각내 보관

 

 

"인간의 기술로 삶을 늘리는 건 천박한 짓인 것 같소. 내 사명은 이제 끝냈으니 우아하게 가겠소"

 

1955418.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대동맥류 파열로 인한 뇌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76.

아인슈타인은 사후 화장하길 바랐지만, 그의 뇌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검을 맡았던 토마스 스톨츠 하비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가 그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뇌를 꺼내 240조각으로 잘라 보관해 버렸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인슈타인을 이렇게 똑똑하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토마스 스톨츠는 대중들에게 비난받았다. 어떻게 학자의 양심을 저버리고 동의 없이 아인슈타인의 뇌를 잘라 보관했느냐고. 하지만 당대 최고 천재의 뇌를 그대로 화장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판단했던 걸까. 역설적으로 그의 일탈(?) 덕분에 후세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의 뇌를 박물관에서 볼 수 있게 됐다.

 

 

독일 출신 천재, 10대에 미적분 독학 터득

아인슈타인은 1879314일 독일 울름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일화들로는 그가 12살에서 16살쯤 미적분을 독학해 그 원리를 완벽히 이해했다는 점, 학교에서 수학 선생님에게 난해한 질문을 해 말문을 막히게 한 점 등이 있다.

청소년기에는 수학과 물리학에 심취돼 있었고, 1896년 고등학교 졸업 시험에서 대수학과 기하학, 물리학에서 최고 점수인 6점을 받고 졸업했다.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로 진학한 그는 수학 물리 교육과정을 밟았다. 한국으로 치면 사범대학 수학교육과와 물리교육과 복수전공이다. 그는 대학생 시절에도 자신이 평소 관심이 많았던 수학과 물리학에서 최고점을 받을 정도로 우수했다. 물론 그의 관심 밖에 있던 과목 점수는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말이다.

졸업 후 꽃길이 펼쳐질 줄 알았지만, 아인슈타인의 첫 직장 생활은 의외의 장소인 보험회사에서 시작한다. 이유는 2가지 정도로 추정된다.아인슈타인의 자만심과 불성실한 태도를 싫어한 지도 교수가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고, 반유대주의 정서가 강하던 당시 유대인이었던 그가 직장을 구하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아인슈타인은 돈을 벌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마저도 얼마 안 돼 잘리고 만다. 천재 아인슈타인의 다소 인간적인 초기 청년기였다.

 

 

26세 특수 상대성 이론 논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아인슈타인은 대학교 동창이자 친구였던 마르첼 그로스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 결과 스위스에서 특허청 심사관으로 직장을 구할 수 있게 됐다. 이곳에서 특허 등록이 가능한지 판정하고 허가를 내리는 업무를 했다.

아인슈타인은 심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업무 자투리 시간에 광양자 가설, 브라운 운동, 특수 상대성 이론, 고체를 이루는 분자의 운동과 에너지,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 등 논문 5편을 독일 물리학 연보에 연속으로 발표했다. 그의 나이 26세일 때다.

심사관 업무를 하면서 논문 5편을 집필한 것도 대단한데, 논문의 내용도 기존 물리학 패러다임을 깨부수는 천재적인 발생이 담겨 있었다. 이 시기가 과학계에서 '기적의 해'라고 회자하는 이유다.

그가 발표한 특수 상대성이론은 빛의 속도가 모든 관측자에게 동일하다는 원리를 바탕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와 느리게 움직이는 물체 간에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설명한다.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는 느리게 움직이는 물체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그 물체의 길이는 짧아지게 된다. 물체의 움직임 속도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 논문으로 핵물리학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E=mc², 에너지는 질량과 광속(빛의속도의 제곱)을 곱한 것과 같다는 공식을 만들었다. 이는 작은 질량이라도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음을 밝혔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원자력 발전 외에도 GPS 보정, 기초입자 발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계속 검증, 활용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시간이 지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심사관에서 교수가 된 아인슈타인아이작 뉴턴의 권위에 도전, 결과는?

특허청 심사관 시절 발표한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은 단숨에 최고 과학자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심사관 직을 내려놓고 본격적인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여러 대학을 거쳐 교수가 된 그는 연구에만 전념했다.

교수가 된 아인슈타인은 이 시기에 10년간 연구 끝에 1915'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과학계에서 진리로 여겨졌던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중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이론에 따르면 중력은 시공간을 휘게 만들고, 중력의 영향을 받는 물체는 휘어진 시공간에 따라 움직인다고 했다. '중력이란 물체끼리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다'고 한 아이작 뉴턴과는 배치되는 주장이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1919년 영국인 A.S.에딩턴은 일식 관측으로 광선의 굴절을 확인하려 했다. 아인슈타인이 옳다면, 지구--태양-별이 일직선상에 있을 때, 태양의 질량으로 생긴 중력이 시공간을 휘게 만들어, 가장 뒤에 있는 별의 빛이 지구에 휘어져 보여야 한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관측 결과 아인슈타인의 주장대로 광선의 굴절이 확인된 것이다. 과학계의 패러다임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천재도 인간이었다

 

특수 상대성 이론, 일반 상대성 이론,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 등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발표될 때마다 세상은 그의 천재성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도 실수 투성이 인간이었다. 한 번은 기차 여행에서 기차표를 분실했다. 주머니를 뒤져보고 가방을 살펴봐도 기차표는 온데간데 없었다. 아인슈타인을 알아본 역무원은 그냥 가라고 했다. 하지만 고집 센 아인슈타인은 계속 기차표를 찾겠다며 버텼다. 답답했던 역무원은 안 보여줘도 된다고 재차 말하자 그는 "기차표를 찾아야 내가 어딜 가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전화번호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뇌에 전화번호를 넣을 바에야 다른 지식을 넣는 게 낫다'며 자기 전화번호도 평생 외우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자기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할 때마다 수첩을 뒤적거려야 했다는 설도 있다.

 

 

의도 벗어난 핵무기 탄생

아인슈타인은 평화주의자였다. 세계 2차대전 당시 핵무기 폐지를 지지했던 그는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과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 아인슈타인은 핵무기 위험성을 경고하고 세계 평화를 논의하는 퍼그위서 회의도 개최했다. 이 모임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3차 세계대전이 어떤 무기로 치러질지 모르지만, 4차 세계대전은 막대기와 돌로 싸울 것이다"는 다소 충격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연구에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세상을 떠났다.

 

 

 

머니투데이

박상혁 기자

 

반응형